쉬어가는 마당/재미있는 외국이야기

황제의 침전

신바람맨/HL4CCM/김재호 2024. 5. 2. 20:04

                 ●재미있는 외국이야기-185●

                            “황제의 침전”

복면을 쓴 자객이 칼로 이불위를 찌른다. 이불을 걷으면 아무도 없다.

사극물에서 자주보는 장면이다.

황제 암살의 실패장면들.

어떻게 미리 알고 대피 했을까?

황제의 침전은 하나 였을까?

아니면 몇개나 더 있었을까?

자금성(紫禁城/중국의 고궁박물원)의 건청궁(乾淸宮)에는 황제가 잠을 자는 침전(寢殿)이 있습니다.

건청궁 안에는 모두 27장의 침상이 있는데, 이는 모두 황제 1인을 위한 것입니다.

황제는 한사람인데, 침상은 왜 27장이나 놓여있는 것일까요? 황제는 하루 밤에 27개의 침상을 돌면서 잠을 자야하는 것이었을까요?

침상의 용도는 황제의 신변 안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황제는 자신이 원하는 침상을 골라 그곳에서 잠을 자게 되는데, 황제가 잠을 자게 되는 침상의 위치는 황제 신변의 최측근 태감들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매일 황제가 잠을 자게 되는 침상의 위치를 노출하지 않음으로써, 자객으로부터 황제를 보호할 수 있는 안전도를 제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고대 중국의 제왕 가운데에는 포악하거나 무능한 자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의 삶이 힘들어지면 반란이 일어나기도 하였고, 궁중 생활이 힘들어진 궁녀들이 황제를 죽이려는 시도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황제의 침궁에 27장의 침상이 놓이게 된 것은, 명나라 가정(嘉靖) 연간, 세종(世宗) 주후총(朱厚熜/1507~1567)때 발생했던 “궁녀들의 황제 살해 시도 사건” 이후 였습니다. 이른바 1542년에 발생한 “임인궁변(壬寅宫變)” 때문입니다.

명 세종(世宗) 주후총(朱厚熜/1507~1567)

역사 기록에 따르면, 궁녀들에게 가장 가혹했던 명나라 황제는 가정제였으며, 그의 손에 목숨을 잃은 궁녀는 200명이 훨씬 넘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10여명의 궁녀들이 가정제의 목을 졸라 죽이려는 사건이 실제로 발생하였습니다.

중국 역사에서는 이 사건을 “임인궁변(壬寅宮變)”이라고 합니다. 임인궁변은 “궁녀시군/宮女弑君”이라고도 하는데, 임인년(壬寅年)에 발생하였으므로 "임인궁변"이라고 부릅니다.

가정제 주후총은 불로장생을 추구하며, 바람을 빨아들이고 이슬을 마시는 방법으로 신선이 되려고 하였습니다. 당시에는, 매일 아침 잎에 내린 이슬, 즉 감로(甘露)를 받아 마시면 수명이 길어진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가정제는 단약을 만드는데 필요한 13~14세 된 궁녀들을 대규모 뽑아 들였습니다. 그들의 초경 혈(初經血)을 모으기 위하여, 그들의 청결을 유지한다는 이유로, 생리기간에는 금식을 하고 오직 뽕나무 잎만을 먹게 하고, 약간의 이슬만을 마시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가정제는 감로를 채집하기 위하여, 궁녀들을 동원하였습니다. 궁녀들은 매일 새벽 일찍 일어나 황제의 화원(花園)으로 가서 이슬을 모았는데, 이 일로 인하여 많은 궁녀들이 과로로 쓰러졌습니다.

가정 21년(1542년), 양금영(楊金英)을 중심으로 한 십여명의 궁녀들은 황제가 잠을 자는 틈을 이용하여 비단천으로 황제의 목을 조여 그를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매듭을 잘못 지어 황제가 죽지 않자, 궁녀들은 비녀나 머리꽂이 등으로 황제의 몸을 찔렀습니다.

이때, 겁이 많은 장금련(張金蓮)이라는 한 궁녀가 너무 두려운 나머지 방(方) 황후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방황후가 사람들을 데리고 달려오자, 궁녀들은 모두 제압되었습니다.

​그들은 능치처참에 처해지고, 구족이 주살되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당시 가정제를 모시던 단비(端妃)와 왕녕빈(王寧嬪)도 함께 참수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중국 역사상 유일한 궁녀들의 의거(義擧)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궁녀들에게 살해당할 뻔 했던 가정제 주후총은, 시위(侍衛)들이 외부의 자객(刺客)들을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두려운 것은 신변의 최측근에서 시중을 드는 궁녀와 태감들이 더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건청궁을 떠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건청궁 안에 27장의 침상을 놓도록 함으로써 자신이 잠을 자는 위치를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없도록 하였습니다.

건청궁은 위아래 2층으로 되어 있는데, 아래층에는 난각(暖閣)이라 부르는 5칸의 작은 방이 있고, 윗층에는 4칸의 난각이 있으니, 모두 9칸의 난각이 있는 셈입니다.

난각(暖閣)

하나의 난각에 한 장의 침상이 있을 경우에는, 아무리 많아도 9장의 침상이 놓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정제 주후총은 각각의 난각에 3개의 침상을 두어, 모두 27장의 침상이 있게 된 것입니다.

가정제가 잠을 자는 진짜 침상의 위치는 최측근 태감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었으며, 비빈(妃嬪)들에게 알리는 것도 금지하였습니다.

이밖에, 가정제는 살해의 위협을 없애기 위하여, 시침(侍寢)하는 비빈(妃嬪)들은 옷을 모두 벗고 이불에 싸여 황제의 침상으로 들도록 하는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침하는 비빈일지라도 자시(子時)가 되면 태감들에 의해 다시 김밥처럼 이불에 말려 황제의 침상에서 떠나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황제는 적어도 자객의 위협과 여색에 빠지는 위험을 줄일 수는 있었다고 합니다. 자객의 위협은 현실적으로 줄었을지 모르지만, 여색에 빠지는 일이 정말로 줄어들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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