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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이궁(代工), 보따리상의 애환

신바람맨/HL4CCM/김재호 2023. 7. 31. 10:43

            ●재미있는 중국이야기-110●

         “따이궁(代工), 보따리상의 애환”

 

보따리 무역은 낭만이 아니고 현실 입니다.

어느 현역 “따이궁” 보따리상의 애환의 기록 입니다.

나는 '보따리상인'입니다.

흔히 '따이공'이라고 불리는 보따리상이 저의 직업입니다.

지하와 지상도 아닌 회색으로 분류되는 직업군이며 자조적 표현을 빌자면 '배숙자'입니다.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아닙니다. .

다양한 직업 중 하나일 뿐인데 생소한 직업으로 들리는 분들이 많을 뿐입니다.

저도 처음엔 얼래?!

이런 직업이 있었단 말이지! 했습니다.

중국으로 여객선관광을 하신 분이라면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여객선에서 마주치는 일상복 차림새의 차분한 표정인 희끗희끗 장년층 분들이 거의 보따리무역을 하시는 분들입니다.

매일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소규모 무역을 하는 장년층 개미무역군단입니다. 이러한 개미무역이 한.중 16개 항로에서 매일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보따리무역의 기원은 1980년대 초 헝가리와 폴란드 국경지대무역입니다. 지금도 전세계 수많은 국경지대에서는 보따리무역이 이루어지고 있고 그 규모는 무역 전체규모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한.중 보따리무역은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가 선포되고 인천~웨이하이 항로 1990년 개설, 그리고 양국간 우호적 관계가 조성되고 1992년 한중수교가 맺어지면서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1997년 I.M.F 사태로 청.중년층이 대거 일자리를 잃자 이들의 참여로 한.중 보따리무역 규모가 커지고 보따리라고 부르기 어색할 만큼 품목도 다양해졌습니다.

당시 중국은 개혁개방으로 중국시장의 수요가 넘쳤습니다. 따라서 중국해관(세관)에서도 한국 보따리무역상 개인 휴대품의 무관세 총량 한도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한국기업은 이런 보따리무역을 십분 활용했습니다. 오늘날의 택배와 퀵서비스로 활용한 것입니다.

중국에 급하게 보내야할 각종 샘플,원단, 부자재, 자동차부품, 전자제품, 생필품들을 신속 정확성을 이유로 보따리상의 손에 쥐어준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한.중 여객선 항로가 속속 개설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말하면 관광객수요가 아닌 개미군단 무역상인을 겨냥한 항로 증편이었습니다.

김대중 정부는 실업자 해소와 틈새무역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번에 잡는 성과로 자평하고, 심지어 거리노숙자들을 교육시켜 보따리무역에 투입시키는 정책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이 때부터 보따리상을 싸잡아 폄하하는 배숙자란 말이 생겨났을지도 모릅니다.

1999년 외환위기를 벗어나면서부터 한국정부에서는 보따리무역 활동범위를 규제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공산품을 중국에 수출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중국의 질좋고 값싼 농산물을 한국으로 들여오는 형태로 양국간 무역균형을 이루었는데,

한국정부는 농민 보호차원에서 중국 농산물 수입을 제한하기 시작하였고 중국정부도 이에 대한 보복조치로 한국산 공산품들의 수입을 대폭 제한하였습니다.

한중 통상마찰로 이어져 보따리무역이 크게 위축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산 참깨의 경우 한국정부는 관세를 무려 원가의 700%나 매겼고 보따리상이 가져오는 무관세 농산물 총량도 대폭 감소시켰습니다.

또한 관습적으로 내려오던 관례와 규정을 수시로 상인들에게 불리하게 개정하고 새로운 규정을 만들어 보따리상의 활동을 통제, 제한하였습니다.

자국 농민 반발을 잠재우기 위한 정부의 과도한 통제는 보따리상의 최저생계까지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규제가 더해질 때마다 중국정부도 상응하는 규제를 만들어 보따리무역의 끝이 보이는 듯 했습니다.

MBC뉴스는 더욱 가관이었습니다.

농산부와 농민의 이해관계로 발생된 문제가 보따리상의 농산물 밀수때문이라고 보도를 했고 우범죄자로 보도를 했습니다. 그 많은 보따리상이 졸지에 밀수 우범죄자로 국민에게 각인되고 만 것입니다.

정부는 애시당초 아이엠에프 구제금융사태로 발생된 실업자 구제와 기업의 틈새무역 활성화로 축배를 들었지만 농민저항에 굴복하면서 보따리무역을 애물단지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비난에 따른 자아상실과 생계위협에 직면한 보따리상인들 중 특히 젊은층이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대거 떠나고 일자리 구하기 어려운 노인층 소수만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농산물이 밀수냐 아니냐의 문제는 정부의 해석 나름입니다. 관습법도 법이라고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데도 관계부처와 상인간의 오랜 관습인 중량이 정해진 소정의 무관세 보따리 농산물을 밀수라고 대법원 판례까지 이끌어 냈습니다.

개미군단이 반입한 농산물이 판매용으로 변하는 그 시점부터 밀수라는 첫 법해석입니다. 오랜 관습적인 판매형태인 줄은 관계부처도 너무 익히 아는 사실인데도 그 때는 합법이고 지금은 불법이라는 이해하기 힘든 판례가 나왔습니다.

판례의 핵심은 개미군단이 무관세로 반입한 상태까지는 합법이고 이 농산물을 중간상인이 구매하는 시점부터 밀수가 적용된다는 법해석입니다.

그로부터 우여곡절 많은 세월이 흐른 현재는 전국소상인협회장이 불합리한 제도를 바꿔달라는 호소문을 수차례나 근거를 제시하며 관계부처에 탄원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많던 보따리상인도 자취를 감추고 지금은 연로하여 사회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분, 집에 눌러있기 불편한 분, 저 처럼 현역 은퇴하고 해외 여행삼아 소일거리를 원하는 사람, 집에 전기세라도 보태주려고 나온 어르신...

이들만 보따리무역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저 개인적인 바램은 소박합니다.

팔다리가 성한 날까지 보따리일을 이어갔으면 하는 것입니다.

소득은 쥐꼬리지만 용돈 자식들에게 타 쓰지 않고, 할멈과 종종 중국여행도 하고, 배 안에서 무지하게 남는 시간을 독서나 악기연주, 친목 운동으로 활용할 수 있어서 평생직장으로 남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로 간혹 유혹이 있어도 어정쩡한 법이지만 그 테두리 안에서 자신을 지키면 죽는 날까지 손자들의 훌륭한 할아버지 그리고 할멈의 듬직한 남편이 될 것입니다.

어느날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다가 완전히 서로 모르는 날이 올 때까지 난 꿈틀거리고 싶은 것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또한 따이공이라고 불리는 보따리상에 대한 애정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