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는 마당/재미있는 외국이야기

눈돌릴 수 없는 당나라 성문화

신바람맨/HL4CCM/김재호 2023. 2. 25. 11:20
                   ●재미있는 중국이야기-8●

              “눈돌릴 수 없는 당나라 성문화”

반공교육에 길들어진 사고에 폐쇄적인 공산주의 나라의 성문화. 부부증명서가 없으면 법으로 혼숙이 금지된 나라.

그러나 도처의 공원과 길거리의 노골적인 사랑표현은 나를 놀랍고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공원에서도,버스안에서도 남의 눈은 아랑곳 않고 거침이 없었다.

최고의 강성대국 당나라의 성문화는?

당나라는 중국 역사에서 가장 강성했다고 평가 받는데, 사람들에겐 매우 개방적인 정책을 시행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개방은 문화나 경제상의 개방 뿐만 아니라, 여성의 사상과 자유에도 나타났는데요. 여성들의 의상을 놓고 예를 든다면, 당나라의 경제가 번성하였을 때 복장도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여성의 복장은 당나라 초기에는 소박하였으나, 정관성세(태평성대) 때에는 점점 개방적이 되어 가슴은 드러내놓고 겉옷은 얇아졌습니다. 당나라 때 여성들은 풍만한 게 미(美)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몸매가 드러나는 복장들은 그때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럼 복장 외에도 당나라의 여성들은 어느 정도로 개방적이었을까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중국 고대의 여성들은 집문을 나가지 않을 정도로 보수적이라 생각하는데, 이는 송나라의 성주이학이 유행된 후 나타난 것으로 당나라 때의 여성들은 자유를 더 원했습니다.

백거이의 '비파행(琵琶行)'에서는 비파녀가 남편이 집을 떠난 애환을 덜기 위해 강변에서 모르는 남성들과 술을 마시면서 자신의 고충을 숨김 없이 털어놓았다고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당나라 때 여성들은 혼인 관념이 매우 개방적이고 정조에 목을 매지 않았기에 남편과 이혼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는 게 보편스러웠다고 합니다. 이러한 마인드는 백성들 뿐만 아니라 왕공 귀족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당나라에는 211명의 공주가 있었는데, 재혼을 한 공주는 23명이었고, 4명은 세 번이나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 당시 왕궁 귀족들은 재혼으로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는 걸 전혀 꺼리지 않아서 어찌보면 혼인 관념이 지금보다 더 개방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밖에도 혼전 성행위도 당나라 때 성행했었는데요, 대표적인 예는 재주가 있는 여성으로 유명한 황채(晃采)는 이웃 남자와 늘 시를 써서 정을 나눴고 정이 깊어졌을 때 관계를 가졌다고 합니다.

황채의 모친은 이 사실을 알고도 오히려 딸을 나무라지 않고 두 사람이 결혼하도록 도와줬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당나라의 여성들이 개방적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당나라 황실의 시범 작용이 큰 이유입니다. 당고종은 태자일 때 작은 어머니와 눈이 맞아 즉위한 후 황후로 앉혔습니다. 양옥환은 원래 당현종의 며느리었지만 결국 비로 되었습니다.

이렇게 당당한 황실마저도 개방적이었기에 백성들도 이를 따라하였습니다. 당나라의 황실이 개방적이었던 이유는 선비족의 혈통이 있기 때문인데, 이는 유목민족의 시원시원한 성격 때문에 과거 왕조의 보수적인 생각과 달라, 당나라의 사회가 개방적인 분위기었고 여성들도 이에 따라 개방적으로 된 것이었습니다.

https://band.us/band/83688897/post/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