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영상·가이드/해외여행지 소개

일본 - 쓰시마(대마도)

신바람맨/HL4CCM/김재호 2008. 12. 24. 11:10

일본 - 쓰시마(대마도)

 

 

 

@ 위치: 동경 129' 북위34'

@ 거리: 대마도에서 한국까지 49.5 Km  (일본 후쿠오카까지 138Km)

@ 면적: 708 km2 (울릉도 10배, 섬 전체 89%가 산림지대) 동서 폭 18Km,

            남북 길이 82Km

@ 행정 구역: 일본 나가사키현에 속하며 1市6町

           (쯔시마시, 이즈하라 마치, 미쯔시마 마치, 토요타마 마치, 미네 마치,

            카미아가타 마치, 카미쯔시마 마치)

@ 주요 산업: 어업과 수산양식업

@ 인구: 약 4만명

@ 특징: 대마본섬 외에 109개의 작은 섬을 가지고 있으며, 그 중 사람이 살 고 있는

           곳은 5곳, 섬 전체의 89%가 울창한 원시림이고 일본 본토에서 볼 수 없는

           대륙계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산해진미 또한 풍부하다.

           특히 옛부터 대륙(한반도)과의 인적, 물적 교류의 창구로서 많은 사적등 문화

           유산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역사의 섬이기도 하다.

 

 

 

 

 

 

 

 

 

아리아케(有明)

쓰시마의 봉우리로 불리우며, 만요슈(일본 고대 시집)에서도 읊어진 역사와 낭만이

넘치는 명산. 이즈하라 마치를 둘러싸고 우뚝 솟아있으며 정상에는 넓은 초원과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어 하이킹 코스로도 제격이다.

날씨가 좋으면 산 정상에서 이키와 마츠우라의 산들도 만끽할 수 있다.

 

 

 

 

시라다케(白獄)

옛부터 쓰시마 사람들에게 신앙의 대상이 되온 영산이다.

해발 519m의 정상에 서면 360도 전망이 가능하다.

 

 

 

 

 

 

 

 

 

 

 

 

이즈하라 시내 역사 유적지 관광

대마도의 주요 관광지는 이즈하라에 집중되어 있다.

특히 우리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역사 유적지들이 산재해 있다.

 

 

1. 금석성(金石城)

 

역대 대마도주들의 거처였던 곳이며 당시 조선통신사의 접대가 이루어졌던 곳

성벽이 평평하며 전쟁을 위한 성이 아닌 적들의 동태를 살피기위한 망루,전망대 역할을 하던 곳. 성 뒤편에는 아리아케산이 있으며 산의 왼쪽부터 혼마루, 니노마루, 산노마루가 위치함. 성내에는 일본정원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통신사의 접대(일본의 차나 일본문화를 알림)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정원내의 돌은 京都에서 직접 공수해온 것들이었으며 당시의 것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음. 산노마루 앞에서 조경을 생각지 않고 흰 체육관 시설이 들어와 있었는데 이는 10년 후 철거될 예정이라한다.

 

 

 



 
                  2. 덕혜옹주와 결혼기념비
 
역대 대마도주들의 거주였던 金石城 內 경내에 이왕가종가백작결혼봉축기념비 ‘李王家 宗家 伯爵結婚奉祝記念碑’라고 쓰여진 커다란 비석. 이 비석은 1931년 대마도 거주 한국인들(당시 약 6000여명)이 고종의 따님 덕혜옹주와 대마도주 소 다케유키(宗武志)와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것. 1932년 결혼 다음해에 딸(正惠) 하나를 두고 불행히도 1955년에 이혼.
덕혜옹주는 기울어진 국운의 희생으로 어쩔 수 없는 정략결혼을 하게되었고, 두 사람의 결혼은 조선왕조 최후의 왕녀 덕혜를 일본인과 결혼시킴으로써 조선민족의 구심력을 상실케 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당연히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일본측이 일방적으로 꾸민 강제결혼. 이러한 고민으로 옹주는 거의 정신병을 앓는 상태에서 대마도로 출가했다가 결국 병세가 악화되어 이혼하게 된 것. 옹주는 1961년 귀국하여 1989년 비운의 생애를 마감했다. 대마도 시미즈산성(淸水山城)에도 도민들이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세웠던 기념비가 있다고 한다.
 현재 재건된 비석은 옹주가 결혼한 1931년 대마도거주 재일동포들이 성금을 모아 옹주의 대마도 입주를 환영하는 뜻에서 이즈하라 하치만구(八幡宮)경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으나 20여년이 지난 뒤 1962년 도로확장공사 때문에 일시 철거되어 2001년 복원 때까지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한다. 비석이 방치되었던 곳은 반쇼인의 정문 입구 바로 우측에 있는 소케분코(宗家文庫)의 목조건물 옆이었다. 비석은 넘어져서 그 위로 잡초넝쿨이 무성히 자라서 본체는 거의 참모습을 알아볼 수 없었다한다.  한일 양국유지들에 의해 2001년 11월10일 다시 복원됨


덕혜옹주
1912년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4녀로 태어남 고종황제가 60세가 되던 해에 후궁 복녕당 양씨 사이에서 얻은 고명딸로 옹주는 서울의 히노데(日出)소학교를 거쳐 일본에 강제유학을 가게되었으며 1925년 도쿄 여자 학습원에 입학하였지만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신경쇠약에 걸렸다. 일본황후 사다코의 간계로 옹주는 18세 때 1931년 5월 8일 도쿄에서 대마도주인 소다케유키(宗武志, 당시23세)와 정략 결혼하여 이듬해 8월 장녀 정혜를 낳았다. 1945년에는 대동아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이씨 왕가는 특권적 지위를 상실하게 되어 재일 한국인으로 취급되었다. 남편과는 1955년에 이혼, 1962년 일본정부가 준비한 特別機 편으로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 후에 창덕궁 낙선제로 거소를 옮겼다가 1989년 4월 21일 만 76세로 세상을 떴다.
 
   

 

 


   

 3. 반쇼인(萬松院) - 宗家 가문의 유적

 

이 절은 조 일간의 국교수복은 물론 조선과의 교역재개에 공이 컸던 제 19대 蕃主 소 요시토시를 위해 그의 아들 후계자 요시나리(義成)가 1615년 아버지의 명복을 비는 쇼온지(松音寺)로 창건한 것이다. 요시나리(義成)는 부친의 법호를 따서 반쇼인(萬松院)으로 개칭하여, 이후 소 가문의 보리사가 되었다. 때문에 반쇼인은 宗가문이 대대로 이어온 대마번의 원찰이며, 본당은 대마도에서 가장 오래된 모모야마(挑山)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정문: 에도시대건립 좌우 인왕상 1737년에 건립, 京都에서 가져옴 본당 정면에는 고미즈노오(後水尾)천황의 셋째 딸이 쓴 ‘반쇼세이샤노가쿠(萬松精舍之額)’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본당 우측에는 德川가문의 역대장군들의 위패를 안치하고 다른 한쪽에는 조선국왕이 하사한 三具足이 진열되어 있다. 三具足은 동으로 만든 향로, 화병, 촛대 세트를 말한다. 화병은 뚜껑에 사자가 앞발을 들고 않아 있는 모양이 특이하며, 촛대는 새가 거북의 등위에 올라앉아 부리로 물고 있는 진기한 모습을 하고 있다.

 본당에서 산으로 132개의 돌계단을 올라가면 산문(山門)이 있고 우측에 소 가문의 묘지인 고레이야(御靈屋)가 있다. 입구에 서있는 신문고인 간고(諫鼓): (대마도에서는 나이가 들고 지혜로운 사람을 지칭)를 지나 산 위에는 역대 도주의 묘들이 줄지어 있고 일부다처제였던 당시의 상황으로 아래쪽의 묘는 부인들이 위쪽의 묘는 직계자손들이 모셔져 있다.

 재미있는 것은 임진왜란 선봉장 요시토시의 묘는 작은 반면 그 후대 20대 요시나리(義成)와 21대 요시자네(義眞)의 무덤은 훨씬 더 큰 규모라는 점이다.

 그러나 무덤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후계 번주들은 무슨 큰일이 있을 때마다 요시토시의 무덤 앞에서 결정을 했다고 하는데 이는 요시토시가 최후로 남긴 “조선과의 화평을 최우선시”하라는 유언 때문이라고 한다. 묘지 위쪽에는 둘레가 무려 5-7M나 되는 삼나무가 3그루가 있다. 수령이 1200-1600년이나 되며 대마도에서는 최고령으로 나가사키현의 천연기념물로 1965년 5월 17일 지정되어 있다.

 

 

宗家가문의 역사

대마도는 律令시대 다자이후 관하의 一國이었다.

上下縣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國府는 현재의 이즈하라에 있었다.

중세에 이르러 宗家가 한 때 도주 사다모리(貞盛)․시게모토(成職)2대와 제 10대 사다쿠니(貞國)초년까지 본거지를 상현군의 사가(佐賀), 현재의 미네쵸사가(峰町佐賀)로 이전한 적이 있었지만 줄곧 이즈하라가 대마도를 다스리는 중심지였다. 宗家가문이 대마도를 지배하기 시작한데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즉, 헤이도모모리고인(平智成後鳳)이 시초라는 설과 소 시게히사(宗重尙)가 아비루우지(阿比留)를 토벌함으로써 시작되었다는 설로 양분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다자이후의 관직에 있었던 고레무네(惟宗)가 시초였으며 대마도와 연관시켜본다면 1274년의 여원연합선단 침공시 전사한 스케쿠니가 초대 島主였다는 주장이 유력해졌다.

2대 우마타로(右馬太郞), 3대 모리쿠니(盛國), 4대 츠네시게(經茂), 5대 스미시게(澄茂)로 이어진 역대도주들은 다자이후 쇼니우지 치하에서 대마도를 지배하다가 15세기 초기에 슈고(守護)라는 직명을 얻어 지배권이 규슈로부터 대마도로 옮겨졌다. 이후 대마도는 조선과의 관계를 장악하고 16세기부터는 무역을 거의 독점하게 된다.

 고레무네씨는 고레토(惟任) 등과 같이 당시 규슈의 호족이었다.

고레무네우지(惟宗氏)가 고레(惟)자를 빼고 宗氏라고 칭한 것은 조선과의 관계가 수립된 이후부터였다. 후지와라우지(藤原氏)도 이전에 견당사로 파견되었을 때 도(藤)로, 미요시우지(三善氏)는 젠(善)이라 불렸다. 이와 같은 연유로 대마도 가문은 宗家로 칭하게 된 것이다.

 여원연합선단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한 도주는 초대 소 시게히키의 막내 스키쿠니로 대마국 지도다이(地頭代)였으며, 가마쿠라 말기부터 남북조 시대에 걸쳐서는 슈고다지이(守護太宰)소니우지(少貳氏)밑에서 대마도 통치를 맡았다고 한다. 그 후 15세기에는 도주의 직위가 슈고(守護)로 승격하고 北九州로부터 본거지를 대마도로 옮겼으며 1378년 제5대 도주 스미시게(澄茂)가 명실공히 섬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러나 澄茂의 부친은 澄茂전대 도주 츠네시게(經茂)의 동생으로 성을 니이나카무라우지(二位中村氏)라 칭하고 도주의 대관(代官)으로서 세력을 모으고 있었는데 아들 澄茂대에 이르자 도주의 지위를 宗家가문의 직계로부터 빼앗았다.

 그후 1398년에 사다시게(貞茂. 經茂의 손자)가 도주 슈고의 지위를 니이우지(二位氏)로부터 도로 빼앗았으나 니이가문의 저항이 강하여1401년에는 澄茂의 형제간이 가시게(賀茂)가 반격에 나서서 한 동안 실권이 박탈당한 사건도 있었다. 사다시게는 이를 제압하는데 성공하였으나 니이가문의 세력은 계속 팽창하여 사다시게는 이 세력을 감당할 수 없었다. 때문에 가시게의 아들 시게이데(茂秀)에게 도주대관(島主代官, 守護代)의 직위를 내주었다. 그러나 니이가문은 도주대관의 관직과 섬의 8군중 니이군(二位郡), 사스군(佐須郡)의 군사(郡司)직을 본거로 삼고 도주의 지배권 강화에 계속 저항하였다. 이처럼 도주 宗家가문과 니이가문의 주도권을 둘러싼 분쟁은 15세기 말까지 계속되었다. 이런 일련의 사태 때문에 대마도는 조선과의 교류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한편 宗家가문은 대마도 守護의 지위가 다자이후로부터 분리되었음에도 쇼니우지와의 주종관계를 유지해오면서 규슈에 있는 대마도주영지를 보전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15세기 말에도 간혹 北九州에 지원병을 파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1444년에 우오치우지(大內氏)에게 패하여 쇼지우지와 더불어 宗家도 규슈의 영지를 잃게 되었다. 그 후 제10대 도주 사다쿠니(貞國)가 오우닌노란(應仁の亂)때 쇼니우지를 도와 오오우치우지(大內氏)를 몰락시킴으로써 다자이후로 복귀하는데 일조를 하게 되어 이전에 잃었던 영지를 다시 찾기도 했다.

 그 후 사다쿠니는 결국 쇼니우지와 사이가 악화되어 오오우치우지(大內氏)와 긴밀한 관계를 맺는 등 오락가락하였다. 이 무렵 宗家는 종래의 성이었던 고레무네(惟宗)를 바꾸어, 고시라키와(後白河)천황의 후예 헤이 도모모리(平知盛)의 자손이라고 차저하여 쇼니우지보다 격이 높은 헤이시(平氏)로 개성(改姓)한 적이 있다.

 14세기말에는 섬의 행정단위를 종래의 2郡에서 8郡으로 나누고 군시(郡司)를 두었는데 宗家계역이 8개 郡司의 대부분을 차지하여 宗家가문이 섬의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한편 대마도는 고대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의 외침을 받았다.

 그 중요사례로서 811년과 894년의 일본측에서 말하는 소위 여진족의 침입, 1274년과 1281년의 여원연합선단의 침공, 그리고 1419년 세종 원년의 대마도 왜국 정벌을 위한 기해동정 등을 들 수 있다. 宗家가문은 857년(天安1) 전후로 도내에서는 상하현에서 일어난 호족들의 반란에 시달리기도 하였으나 그때마다 이를 진압하여 지배권을 이어왔으며 대외적으로는663년 백촌강 전투이후 대마도가 일 본의 최전방 방위선으로 부각됨으로써 667년 (天智6)에는 아소만에 면한 金田城(신라식양식)을 구축하는 등 외침에 대비하는데 한몫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대마도는 조선과의 빈번한 교류를 이룩하였고 이 결과16세기 후반에는 조선과의 교역을 거의 독점하게 되었다.

1587년 제19대 도주였던 소 요시토시(宗義智)는 豊臣秀吉의 규슈평정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고, 1592년 임진왜란이 시작되자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에서 제1군 선봉장으로 앞장섰으며, 전란 이후 조선조정과 통신사 부활 교섭에 성공함으로써 7년 간 단절된 국교를 수복하는데 공을 세워, 막부는 그에게 쥬시이게지쥬(從四位下侍從), 츠미사카미(對馬守)라는 관직을 내렸다. 이 관직은 근세에 들어서도 이어져서 요시토시(義智)이후 제 34대 마지막 번주 요시아키라(일명 시게마사重正)까지, 즉 1869년 명치유신으로 대마도가 폐번될 때까지 대마도 번주로 승계하게 되었다.

          

 

 

   

 

 
4. 고려문  
 이즈하라의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제1대 도주가
<사지키바라성>을 만들고 사지키바라성 앞에 문을 만들어 세우고
<고려문>으로 이름 붙인. 이 문은 조선통신사를 맞이할 때
이 문을 통과했기 때문에 조선통신사 맞이문이라고도 한다. 

 

  

 

 5. 조선통신사의 비

 

대마도 번의 노력에 의해 임진왜란 이후 약 200년간 (1607~1811) 12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한 사절단- 조선통신사-의 방뭉으로이루어진 활발했던 교류와 우호적인 관계를 21세기 한일 우호의 지향점으로 삼고자 비를 세움. 매년 8월에 열리는 축제 <쯔시마 아리랑 마츠리>에는 조선 통신사 행렬이 재현되고 있음.

 

 

  

 6. 아메노모리호슈(雨森報酬)의 성신외교

 

雨森報酬는 조선통신사 담당 외교관으로 대마도 이테이안에 파견된 에도 막부의 신분야쿠(眞文役)로서 양국 우호친선을 위해 노력한 훌륭한 외교관.

 

이즈하라에는 雨森報酬의 무덤이 남아 있다. 2004년 11월 27일 이즈하라 소학교 강당에서는 그의 250주기제가 열렸고, 이 기제에는 한일 양국의 통신사 관계인사 200여명이 참석하였으며, 기제에 이어 그의 묘소참배까지 이어졌다.

 300년 전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있던 雨森報酬라는 이름이 귀에 익숙해 진 것은 불과 24-25년 전부터였다. 통신사와 호슈에 관한 관심은 재일교포 역사학자 신기수교수가 1972년2월에 제작한 “에도시대의 조선통신사”라는 50분 짜리 기록영화에서 비롯되었다한다.

그로부터 10년후 1990년에 노태우 전 대통령이 일본을 공식방문하여 천황주최 공식만찬 때 행한 연설에서 호슈의 이름이 언급된 것이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한다.

 만찬사 끝 부분에 결론으로서 “270년 전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했던 호슈는 성실과 신의에 바탕을 둔 교제를 신조로 삼았다”라고 말한 것. 호슈에 관한 대통령의 이 한마디가 매스컴을 타게됨으로써 도쿄주재 외교계에서는 물론 일본외무성과 학계에 커다란 파문을 던짐. 노태우 대통령의 방문 이후 얼마 안되어 일본에서는雨森報酬의 평전이 발간되었고 이를 계기로 1995년 조선통신사가 지나갔던 일본 각지의 20여 지자체가 나서서 전국적인 연락협의회를 결성하고 해마다 조선통신사 행렬을 재현하는 축제를 벌이게 된 것 임.

 

 

 

 

                   7. 오후나에(御船江)

 

이츠하라에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조선시대에 일본으로 파견된 통신사 선단을 위한 전용 선착장이 유적으로 남아있음. 대마번이 준설하여 주로 공선(公船)과 무역선 그리고 통신사 선단이 정박하던 곳. 안내표지판에는 대마번의 오후나에로 되어있으며, 현재까지 남아 있는 유구(遺構)는 1633년에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조선통신사 일행은 여기서 하선하여 반쇼인으로 향했다 한다.

가는 길목에 성의 일부가 남아있는 성벽을 따라가다 보면 4개의 맞배지붕 형태로 지은 고려문: 건축양식에서 기인(현지 발음: 가라몬)이라는 현판의 누각이 나온다. 여기서 대마도주가 조선통신사 행렬을 맞이하였다고 하며, 한때 태풍으로 붕괴된 것을 1980년에 복원했다고 한다.

 

<참고> 이곳에서 도보3분 거리에 표류민 거주지도 있음.

 

漂民屋(표류민 거주지)

일본의 해안선에 표착한 조선인 표류민을 이곳에 모았다가 숙박시키고 본국으로 송환시키기 위한 임시숙박시설. 이 모든 것은 정부가 아닌 민간차원에서 이루어졌으며 금품을 요구하거나 하지 않았음

에도시대 때의 조선을 지칭하는 말이 唐이어서 唐人屋이라고도 함

쇼와시대 때는 대마도와 한국인의 어업자간의 교류장소이기도 했음

漂民屋에서 수선사로 가는 길에는 당시 조선통신사가 하선하여 짐을 넣어두었던 창고가 현재까지 남아 있음

 

 

 

 8. 修善寺

 

백제의 비구니 법묘(法妙尼)가 세웠다

경내에는 구한말 충의 지사 최익현(1833-1906)선생의 순국비가 있음

선생은 성리학자요, 위정척사파의 대표, 배일파의 한사람으로서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과 통감부설치를 반대하여 전라북도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켜 조선관군과 일본군에 항쟁하다가 포로가 되어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선생은 포로가 되어 대마도로 끌려와 일체의 음식을 끊고 순국하였다. 1986년 한일 양국의 유지들이 ‘대한인 최익현선생 순국비’를 세웠다. 선생은 당시 74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물 한 모금조차 마시지 않은 채 단식으로 항거하다가 세상을 떴다고 한다.

 

최익현

경기도 포천출신 1855년(철종6) 문과에 급제. 고종황제 때까지 여러 관직을 역임한 유학자

불의와 부정을 척결하여 관명을 날리고, 1868년(고종5) 경복궁 중건의 중지, 당백전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박탈당함 그 후 1873년 동부승지로 기용되자 명성황후측근 등 반(反)흥선 세력과 제휴, 서원철폐 등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하고, 호조참판으로 승진되어 다시 대원군의 사례를 낱낱이 열거, 대원군 실각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군부(郡父)를 논박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제주도에 2년 간 위리안치(圍離安置)되었다가 1875년에 풀려났다. 이듬해 명성황후 척족 정권이 일본의 통상을 논의하자 조약체결의 불가침을 역설하다가 다시 흑산도에 유배되었으며 1879년 석방되었다.

 1895년에는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를 반대하다가 투옥되었다. 선생은 단발령이 내리자“내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는 말로 강제적 단발령에 목숨을 걸로 반발하여 당시 유학자들의 기백을 나타내기도 했다.

1898년(광무2) 궁내부 특진관이 되고 뒤에 중추원의관, 의정부 찬정, 경기도 관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 향리에서 후진교육에 전력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고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고종의 밀지를 받고 상경, 왕의 자문에 응하였으며, 일본으로부터의 차관금지, 외국에 대한 의부심(椅附心) 금지 등을 상소하여 친일 매국도배들의 처단을 강력히 요구하다가 두 차례나 일본헌병들에 의해 향리로 압송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심경을 토로하고, 8도 사민(士民)에게 포고문을 내어 항일투쟁을 호소하며 납세거부, 철도이용반대, 일체의 일본상품 불매운동 등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였다. 그러나 결국 일본제국주의자들의 한일합병조약이후 나라를 빼앗길 위기에 처하게 되자 선생은 74세의 고령임에도 임병찬, 임락, 등 80여명과 함께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모집‘寄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16조목을 따지는 ‘義擧疏略’을 배포한 뒤 순창에서 dir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과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항쟁 1년 만에 일본군에 의해 포로로 체포되어 1906년8월28일 대마경비대에 투옥되었다.

선생은 감옥에서 일본관헌에 대한 항의를 위해 단식하다가 12월에 순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생의 단식사 설은 재일 동포 작가 김달수 씨와 역사학자 강재언 씨의 저서를 통해 정착되었다.

 

 

  

 9. 국분사(國分寺)

 

1811년 “역지빙례”(외국에서 오는 사절단을 에도로 들이지 않고 가장 가까운 번에서 맞이하는 것)정책에 의해 제 12차 통신사는 德川막부가 있는 에도까지 가지 못하고 대마도에서 예를 치뤘는데 당시 조선통신사가 숙박하던 시설이 현재 공터로 남아 있다. 1807(文化4) 國分寺가 旅客으로 신축되었고 정문도 당시에 건립된 것. 한국 측 숙소

 

 

 

10. 아유모도시 자연공원

  은어가 돌아오는 곳이라는 뜻의 아유모도시 공원은 대자연 경관을 살린 자연공원으로 강 전체가 천연의 화강암으로 덮혀진 전국에서도 진귀한 곳으로 구름다리, 산책로, 캠프장 등이 갖추어져 있다.

 

 

 

 

 

 

 

 

11. 미녀총

이즈하라의 니이산 중턱에 있는 미녀총

쯔쯔지방의 효성이 지극하고 뭇 남성들이 흠모하는 뛰어난 미인이

어머니와 살고 있었는데 궁정의 부름을 받고 끌려가다

혀를 깨물고 자살한 곳이라고 한다.

쯔쯔지방에는 고려의 도래인이 많아

이 처녀도 한국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설도 있다고....

 

 

 

 

12.쯔쯔자키 공원

 

대마도 최서남단의 공원인 쯔즈자키 공원.

아유모도시 공원과  차로 15분 거리에 있다.

고려의 도래인이 많이 살았다고 하며

'쯔쯔미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미인이 많았다고 한다. 

이 주변은 해수의 흐름이 빨라 옛부터 힘든 수로로 알려져 있다.

대한 해협과 쓰시마 해협의 경계에 해당한다.

한국 전망대와 함께 한국과 로밍없이 통화가 가능한 곳이기도 하다.

 

 

 

 

 

 

 13. 이시야네

 

돌지붕. 대마도의 돌 문화를 대표하는 건물로,

겨울 강풍이 심한  시이네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불과 몇 호 밖에 남아 있지 않는 이 돌지붕은

대마도에서 산출되는 널판지모양의 돌로 지붕을 이은 건물이다.

곡물, 의류, 가구등을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되어 왔다.

일본에서는 여기 이외에는 보기 힘든 진귀한 건축물이다.

 

 

 

 

 

  

 14. 코모다 하마신사 몽고군 내습지

 

이곳은 몽고의 두번에 걸친 일본 침입 시 최초의 상륙지였던 곳이다.

몽고는 두번 모두의 원정에서 실패로 끝난다.

그러나 일본은 태풍으로 인하여 두번 모두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며,

이때 분 바람을 신이 일본을 구하기 위하여 일으킨 바람이라고 하여

'가미가제'(神風)라는 말이 유래하기도...

 

1274년 10월. 함포(마산)를 출발한 고려와 몽고의 3만 정벌군은

대마도의 코모다하마 해변으로 상륙한다.

이 때 대마도의 1만 병사들은 모두 패하여 목숨을 잃었다.

특히 당시의 도주는 67세의 노장이었으며

전쟁 후 목과 몸이 따로 발견되어

그 싸움의 치열함을 알 수 있었다 한다.

숨진 사람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코모다하마 신사에서는

전사한 병사들의 위패를 받들고 있으며

매년 11월에 위령재를 지낸다.

도쿄의 야스쿠니 신사와 함께 일본에서 두곳뿐인 군인을 모신 신사이다.

야스쿠니 신사와 다른 점은 야스쿠니는 전범을 같이 모시고 있고

이곳은 자신의 나라를 지키다 전사한 병사를 모시고 있는 점이다.

 

 

 

 

 15. 에보시다케 전망대

 

에보시타케 전망대는 상대마 일대 관광의 일미인

아소만을 360도 둘러 볼 수 있는 유일한 전망대이다.

몇겹의 산들과 바다 위에 떠있는 크고 작은 섬들과

리아스식 해안의 들쑥날쑥한 해안선은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16.와타즈미신사

 

토요다마쵸우(豊玉町)의 상징인 이 신사는 일본건국신화의 주역인 하늘 신 ‘히고호호데미(彦火火出身)’와 용왕의 딸‘툐요다마히메(豊玉姬)’를 제사지내는 해궁(海宮)으로 바다 신을 모신 신사로는 가장 오래된 신사이다.

본전 정면의 바다 속에 서 있는 도리이는 만조 시 2M정도 바다 속으로 가라앉으며 50여M 간격으로 물에 잠긴 또 하나의 도리아가 보이고 같은 간격으로 세 번째가 바로 그곳이 와타즈미신사의 입구이다. 세 번째는 바다와 육지의 경계지점에 서 있고 신사 본당 왼쪽 편에는 약 100여M가 넘어 보이는 긴 수로가 나있다. 맞은편에는 20여명이상이 탈수 있는 배가 본당 앞 수로 위에 준비되어 있었다.

이 신사는 대마도에 남북종단 자동차 도로가 건설된 뒤에 바다를 매립하여 조성한 매립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며 이 신사에 참배를 하러 올 때는 배를 타고 들어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신사의 안쪽에는 토요다마히메의 분묘(豊玉姬之墳墓)라고 새겨놓은 지름이40㎝는 족히 될 둥글넙적한 돌비석이 약 30㎝높이가 될만하고 펑퍼짐한 네모꼴이 세로나 가로의 길이가 1.5M쯤 되는 돌 무지위에 아주 단정히 올려 놓여져 있었다. 진짜 분묘는 아니고 나가도메 작가의 글에 보면 토요다마히메의 분묘라고 전하는 천연의 암장(岩場)이 있어서 토리이를 세우고 금줄까지 쳐놓은 것이며 고고학적으로 볼 때 분묘는 아니라 한다. 그 형태로 보아 분명히 이와구라(盤座:신령이 머물고 있는곳)로서 신사가 이곳에 있기 이전에는 이 이와구라(盤座)가 제를 지내는 祭場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따라서 돌무지가 바로 ‘이와구라(盤座)’ 라 한다.

 

≪일본의 건국신화와 와타즈미신사≫

일본황실의 족보를 보면, 고사기의 신화에서 보았듯이 많은 신들을 조상신으로 해서 황실의 계보가 이어져 내려왓는데 이것이 건국신화이다. 결국엔 신화적 영역에서 현세적 영역으로 변신하면서 맥을 이어가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다. ‘다까미무스미(高皇産靈)’의 외증손으로 ‘지상에 강림한‘ ‘니니기’의 아들 히고호호데미(彦火火出身)가 잃어버린 형의 낚시 바늘을 찾아 헤매다가 용궁까지 가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용왕의 딸 ‘토요다마히메(豊玉姬)’와 결혼하여 3년을 보낸 후 낚시 바늘을 찾아 가지고 나왔는데, 그때는 아내가 아기를 배어 만삭이 되었으므로 같이 뭍으로 나오지를 못하였다. 며칠 뒤 풍랑이 심한 어는 날 풍랑을 타고 여동생‘다마요리히메(玉依姬)’를 데리고 남편을 찾아 뭍으로 나왔다. 해변에 손수 산옥을 짓고 ‘절대로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 고 남편에게 당부를 하였으나 이 약속을 어기는 바람에 결국 큰 뱀이 괴로워 나뒹구는 꼴을 엿보임을 당했다고 화가 난 豊玉姬는 낳은 아이를 해변에 그대로 버려둔 채 ‘우나사까(海坂:용궁으로 드나드는 문으로 이곳을 헤집으면 나타나고 이곳을 메우면 사라진다는 곳)’를 다시 메워서 용궁으로 돌아가고 말았다고 고사기에 쓰여있다. 이때 낳아서 버린 아이가 별명을 이소라(磯郞)라고 하는 ‘우가야후기아에즈’신이고 그 신이 다시 용궁의 차녀, 즉 이모인 ‘다마요리히메(玉依姬)’신과 결혼하여 처음으로 인격화 된 천황이 진무천황(神武天皇)을 낳으니 이 사람이 바로 사람으로서의 초대천황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의 황실계보는 天神의 부계와 海神의 모계로 된 혈통이라는 것으로 이것이 해양국가의 국가상이다 국가상의 발원지가 본토가 아닌 대마도 ‘니이’지역의 해변‘와타즈미(和宮)’라는 사실. 이 지역은 세형동검, 말방울, 팔찌 등의 청동기와 철기 그리고 경질토기까지 다른 곳에서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조상들의 유물이 출토되는 곳이다. 지금도 대마도에서는 와다는 바다의 후미진 곳 츠는 조사,미는 뱀을 뜻한다한다. 와다즈미는 다름아닌 바다의 용궁이라는 뜻이며 용궁신화의 발원지가 와다즈미신사라 할 수 있겠다.

 

 

 

 

 

 

 

 

 17. 한국인 전망대와 조선국 역관사 조난 추도비

 

포구앞쪽에 동서로 길게 보이는 섬은 우니지마‘海膽島’우리나라 말로 해율도‘海栗島’이다. 현재 이곳에는 일본 해상 자위대의 레이더기지가 설치되어있다. 이섬은 천연의 방파제 구실을 하며 ‘와니우라‘를 보호하고 있다. 섬 너머 바깥쪽에는 암초들이 악어이빨처럼 솟구쳐 있기 때문에 큰 폭풍 때에는 이곳을 지나는 배들이 부딪쳐 재난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1703년 조선에서 파견된 역관사들도 이곳에서 조난을 당했으며 역관사는 대마도에 큰 행사가 있을 때 약 100여 명씩 파견하는 조선의 사절단으로 숙종 29년인 1703년 음력2월5일에 한천석을 대표로 하는 역관사 일행 104명은 대마도 도주 소 의진(宗義眞)의 죽음을 애도하고 새로 번주가 된 宗 의방 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하여 대마도에 파견되었다가 풍랑 때문에 이곳에서 좌초되어 전원이 죽었다. 와니우라 앞 바다에서 죽음을 당한 한 천석 일행을 추모하기 위해 한국학자(황수영박사, 정영호박사)들과 대마도관계자들이 힘을 합쳐 세운 비석으로 비신을 받치고 있는 돌들이 총112개이다. 초석을 112개로 한 이유는 역관사 일행104명이 조난을 당할 때 배 안에는 8명의 대마도사람(대마도 관리4명과 뱃길인도자4명)이 타고 있다가 변을 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8. 팔번궁(八幡宮)신사

 

이즈하라 시내에 있는 대마도의 대표적인 신사

입구의 왼편의 신사(이마미야신사 今宮神社): 고니시유키나가의 딸로 19대 도주 소요시토시와 결혼한 ‘고니시마리아’를 제사지내는 곳

세끼가하라전투에서 패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참수를 당하고 그의 딸을 처로 삼고 있던 대마도번의 존립이 위태로운 사태에 처하게 된다. 고니시 마리아는 소 요시토시로부터 즉시 소박을 당하고 나가사끼로 건너가 죽었다고 한다. 그 고니시 마리아를 이즈하라에서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은 악령의 재앙을 두려워해서란 말도 있다.

‘이마미야신사’에 모셔진위패를 보면 祭神 오오구니누시 노 미고도(大國主命) 스가와라미치자네(菅原道眞)라고만 되어 잇고 고니시마리아의 이름은 없었다.

 

소 요시토시란 인물은:

요시토시는 1588년 20세의 젊은 나이로 대마도주‘요시시게’의 뒤를 이었는데, 25세가 되던 봄 조선침략의 선봉에 서도록 명을 받아 많은 부하를 잃게 된다. 5천명이 동원되었는데 고작 2천명밖에는 바다를 건너지 못했다. 그것은 평양과 행주산성의 두 싸움에서 크게 당하였기 때문이지만 대마도를 통과하는 일본본토의 병사들에 의한 약탈과 파괴도 피폐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생명선이라고 할만한 조선무역의 길마저 끊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그렇게 될 것을 충분히 예측하고 있었다. 장인인 고니시 유키나가와 짜고 전쟁만은 막아보려고 무진 애를 썼던 점이 그 반증이다.

전쟁이 끝나고는 대마도의 살길은 오직 조선과의 평화적 관계와 무역이란 것을 다시 한번 통감했음에 틀림이 없다. 일본군이 패퇴하고 1개월 뒤인 1598년 12월 그는 사람을 조선으로 보냈고 다음해에는 3월과 6월 두 번이나 사람을 보내 평화의 계기를 잡아보려고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고니시가 장인이기도 한 연유로 해서 그는 1599년 7월 大阪城으로 들어가 豊臣편의 장수의 한 사람으로 伏見城공략에 가담했었다. 하지만 豊臣쪽의 장래에 자신을 갖지 못해서인지 2개월 뒤에 벌어진 세끼가하라전투에서는 직접 병사를 보내지 않고 가신인 d야나가와 시게노부(柳川調信)의 아들 가게나오(影直)를 豊臣쪽의 총사령관 격인 이시다 미쯔나리의 군진으로 보내 얼  렁뚱땅 적당히 얼  버무리고 말았다. 그래서 豊臣 쪽이 패하자 이번에는 처(고니시 유키나가의 딸)을 내쫓아 장인마저 배반하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요시토시는 德川家康의 노여움을 피하고 조선과의 평화교섭에 전력을 경주할 수 있게 되어 선린관계회복에 겨우 도달하게 된 것이다. 그가 역사적의 전개를 민감하게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국경의 섬 대마도를 살려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라 한다.

 

  

  

                        19.만제키바시

만제끼운하위에 걸쳐진 다리는 1904년 완공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총3회에 걸쳐 보수공사를 하였다. 지금의 다리는 (1975년 개통) 처음보다 약 10M정도 이동된 자리이며 주민들이 배를 운항할 때 섬을 한 바퀴 돌아가는 불편을 없애고 군함의 출입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만든 다리이다. 이 지역의 수심은 4.5~5.1M이고 폭 40~65M, 길이210M이다

1904년 2월 4일 일본은 러시아와 국교를 단절하고 대(對)러시아전쟁을 결정하게 된다.

여러 과정을 거쳐 러시아는 육전(陸戰)에서의 패배를 만회하려고 로제스트벤스키 지휘하의 발틱 함대를 회항시켜 5월 26일 27일 28일 대마도 주변에서 대 해전을 전개하였으나 도고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가 이끄는 일본연합함대에 격파되어 전멸하였다. 도고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제독은 대마도 아소만에 미리 어뢰정을 주력으로 한 수뢰 특공단을 대기시켜 놓고 있다가 발틱함대가 대마도 돔북쪽 지점에 이르자 만시끼운하를 이용하여 적 함대의 후면과 측면을 기습 공격하여 기선을 제압한 후 주력 함대(우리나라 진해만에서 출동)가 러시아 발틱 함대의 정면을 가로막고 화력을 퍼부어 천하무적이라던 러시아 발틱 함대를 괴멸시켰다.결국 이전투는 볼셰비키혁명에 무기력하게 쓰러지고만 러시아제국이 종말을 고하게 되는 서곡이 되었고 이렇게 러시아를 굴복시켜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한 일본은 1905년 우리나라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1910년에 한일합병을 단행하였다.

 

 

 

로고를 클릭하시면 (주)신바람투어 홈페이지로 연결됩니다

 

www.sinbaramtou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