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情)과 한(恨)을 빼면 없더라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의 뜻을 찾아보면 (동사로서의 의미로) 이렇게
적혀있다.
1. 상냥하게 상대방의 기분을 즐겁게 해주는 것,
2. 손님에게 음식과 숙박을 제공하는 것.
3. 마음으로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
4. 마음으로 따듯하게 돌보는 것.
5. 그리고 친절을 실천하는 것.
그러나 ‘하늘=sky'처럼 엔터테인먼트는 딱 떨어지는 우리말이 없다.
정(情), 한(恨), 패기(覇氣)를 영어로 번역할 수 없는 것처럼 엔터테인먼트도 굳이 한글로 번역이 필요없이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평소에 심심하면 “뭐 재미있는 일 없냐?” 이것이 엔터테인먼트의 시작이다.
2004년 필자는 엘빈 토플러와 만나서 ‘21세기 엔터테인먼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엘빈 토플러는 미래의 사회상을 알고 싶어 하기에 설명을 했다.
“인류 2000년 동안 사회를 유지한 양대 축은 ‘일과 종교’였다.
21세기엔 엔터테인먼트, 즉 잘 노는 것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일도 재미있어야 하고 , 종교도 재미있어야한다.
그런 면에서 시대에 맞는 새로운 종교형태가 마련될 것이다.
종교를 직업으로 하는 사제가 설파하는 획일적인 교리에 따르는 맹종이 아니라
자기 철학, 명상, 자연이 어우러진 동호회 형태가 될 것이고 종교보다 정서와
문화가 우선될 것이다.
1994년 내가 처음으로 말했던 것처럼 이제 문화영토권시대다.
IQ, EQ도 있지만 이제 엔큐(ENQ)시대가 올 것이다.”
중국, 일본, 한국 삼국의 문화의 특징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중국은 반점(飯店)이라한다. 먹는 곳=자는 곳. 중국은 기후가 건조하여 씻지
않고 기름진 음식을 먹어야 생존이 가능하므로 잘 씻지 않는다.
일본은 료칸(여관:旅館)이라한다. 씻는 곳=자는 곳. 습한 해양성 기후로 자기
전에 꼭 씻어야하며 주로 온천에 위치한다.
한국은 주막(酒幕)이다. 술 먹고 노는 곳=자는 곳. 건조하지도 습하지도 않은
좋은 기후로 먹고 즐긴다.
그러나 주막이 생긴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고래부터 그 동네의 주막은 그
지역에서 가장 잘사는 집이었다. 대문 앞에서 ‘이리 오너라.’하면 하루 묵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냥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이 아니라 숙객이 각 지방의 정보
를 전해주고 재미난 재담으로 흥겹게 해줘야 잘 대접 받았다.
부자는 베풀어야 한다는 우리 전통은 여기에서 생활화되어 있었다.
초가지붕을 없애고 슬라브 지붕을 덮은 새마을 운동으로 근대화를 이루었지만
우리 전통은 희미해졌다. 우리 전통의 흔적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이 연변의
조선족이다. 조선족들은 만나면 떠들고, 술 마시고, 싸우고, 다시 만나 화해하고
떠든다. 싸우고 다시 만나는 조선족을 중국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우리도 명절에 10시간 가까이 고속도로에서 고생고생하며 오랜만에 친지들이
모이면 “니가 부모에게 잘 한 일이 있느냐?”, “형님이나 잘하십시오.”,
“동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하면서 한바탕 홍역을 치르고는 ‘다시는 안 온다'
며 대문을 박차고 나가지만, 다음 해 다시 만나 술 한 잔하고 떠들고 취한다.
여기에 한국인의 엔터테인먼트가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정서는 정(情)과 한(恨)이다.
정(情)은 고운 정, 미운 정, 더러운 정이 있다.
미워도 다시 찾는 정. 자식이 ‘웬수’라고하면서, 20살 넘어 학비 대주고 결혼비용
대고, 요즘에는 취업까지 시켜주는 나라는 우리뿐이다.
정이 있는 곳에 한이 있다. 춘향과 이몽룡이 정을 통해 사랑하다가 이몽룡이
정을 끊자 춘향은 한이 되었다. 정과 한의 순환이 끊어지면 한이 맺히게 된다.
<원(怨)과 한(恨)은 다르다. 한은 당시 시대와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여 발전으로
승화할 수 있지만 원은 남을 탓하게 되어 복수에 복수를 부른다.>
한국인의 엔터테인먼트는 비로 이러한 정과 한이 잘 순환되게 적절히 혼합하는
것이다. 한국 엔터테인먼트의 정수는 상여 나갈 때 천진하게 희희낙락하는
만장기 든 아이에서 찾을 수 있다. 서러운 상주는 주저앉았지만 잿밥에 관심 있는
철모르는 아이는 앞으로 나간다. 그래서 생과 사가 순환한다.
지금의 ‘예술의 전당’ 콘셉트를 정할 때 프랑스 작가에 의뢰를 해야 했다.
가장 한국적인 예술을 통찰한 그는 한국 문화예술의 원천을 무속의 굿에서 찾았다.
정한에 얽힌 우리의 마음을 풀어주는 일에 종합예술의 하이라이트인 굿만 한
것이 없다는 견해였다. 우리는 우리의 것을 너무나도 모른다.
심지어 홀대하기까지 한다.
영어로 번역될 수 없는 ‘정과 한’이 우리 예술문화 혼의 근간임을 잊지 않을 때
가장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엔터테인먼트를 펼칠 수 있다.
강의가 끝나고 질문공세가 쏟아졌다. 그 중 “일본은 노벨 문학상을 받는 데 우리는 받지 못한다. 외국인들이 한국인을 이해할 수 있는데 어려 움이 크다. 한국적인
정서의 한계 아닌가?”라는 질문이 인상 깊었다. 이렇게 답했다.
일본이 근대화하면서 겪은 문제가 민족과 세계화의 충돌이었다.
영어와 국어를 공식어로 병행하자는 주장이 팽팽했다. 요즘 우리의 영어 광풍과
비슷한 현상이었다. 필리핀처럼 영어를 공식어로 지정하면 세계화에 유리하지만 자국의 문화가 사멸되는 중대한 결함이 발생했다. 오랜 격론 끝에 일본은 결론을 내렸다.
해답은 ‘번역’이었다. 일본어는 일본어대로, 영어는 영어대로 발전하되 중간에
번역을 집중하기로 했다.
일본 문화도 살리고 외국 문화도 받아들이되 주체적으로 그리고 세련되게
알리겠다는 것이었다. 그 전략은 적중했다.
일본은 과학뿐 아니라 인문학에서도 세계적으로 선도하게 되었다.
우리문학을 해외 알리려면 일본어로 번역해 다시 영어로 번역하는 것이 더 훌륭
하다는 웃지 못 할 현실도 여기에 기인한다. 우리는 이런 교훈을 되새겨야한다.
이렇게 해서 필자는 처음이자 마지막 대학 강의를 끝맺었다.
엔터테인먼트가 필요한 데가 어디 일과 종교뿐이겠는가.
둘이상 모이면 아니 거울보고도 엔터테인먼트를 펼친다면 인생이 그 아니
즐겁지 않겠나
- 차 길 진 칼럼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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