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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子의 故鄕 곡부(曲阜)와 삼공(三孔)

신바람맨/HL4CCM/김재호 2021. 11. 14. 12:30

孔子의 故鄕 곡부(曲阜)와 삼공(三孔)

 

                                                                                      南坡 김 재 호(金 在 祜)

 

◈ 曲阜(곡부)

중국 산동성 곡부(曲阜)시는 孔子가 태어난 고향으로, 유명한 山과 江은 없지만 니산(尼山)과 사수(泗水)가 있어 山水의 품격을 제대로 갖춘 곳이다. 니산(尼山)은 높지는 않아도 孔子의 출생지로 神이 있는 山보다 더 신령스러워 仁과 道德의 근원이며 사수(泗水)는 모든 지혜의 원천이라고 사람들은 믿고 있다.

논어(論語) 제六편의 옹야편(雍也篇)에 樂山樂水(요산요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子曰 知者樂水 : 공자왈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仁者樂山 :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

知者動 仁者靜 : 지혜로운 자는 움직이고 어진 자는 조용하며

知者樂 仁者壽 : 지혜로운 자는 즐겁게 살고 어진 자는 오래 사느니라

곡부는 유교의 발상지이자 총본산으로 춘추전국시대에 번창했던 작은 제후국 노(魯)의 수도였으며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2000여년간이나 儒家를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통치사상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중국 대륙을 광기로 휩쓸었던 문화대혁명 동안에는 儒敎와 孔子유적은 철저히 파괴되었는데 곡부에 있는 삼공(三孔) 즉 ‘공묘(孔廟), 공부(孔府), 공림(孔林)’은 말할 것도 없고, 전국에 있는 공자 사당을 불태워 없애려 했다.

하지만 儒敎와 孔子에 대한 비판은 마오쩌퉁의 사망으로 막을 내렸고, 1980년대에 들어 三孔 유적을 복원하는데 성공했다. 三孔이 1994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곡부는 다시금 유교의 발상지로 주목 받고 있다. 봉건시대의 유물로 치부되었던 儒敎의 덕목들이 21세기 생활 규범으로 재조명 받기에 이르렀으며 중국 정부가 孔子와 儒敎를 다시 중시하면서 곡부는 20년 전에 비하면 천지개벽 수준으로 탈바꿈했다.

또한 곡부는 孔子의 사당과 묘지, 그리고 중국의 가장 위대한 성인을 기리는 기념물들을 관람하기 위해 찾아오는 참배객과 여행객들에게 변함없이 중요한 유적지가 되고 있다.

 

 孔廟(공묘)

孔子(BC551~479)를 모셔놓은 사당으로 후세에 와서는 '선니묘(先尼廟)' '선성묘(先聖廟)' '문선왕묘(文宣王廟)' '선사묘(先師廟)' '지성묘(至聖廟)' '문묘(文廟)' 등으로 바뀌어 불렸다. 위치는 곡부시 중심에 있으며 BC 478년 孔子가 타계한 다음해에 제자들이 공자가 직접 강의했던 행단(杏壇)에 大成殿을 지어 그의 위패를 모신 것이 공묘의 시초였다.

공묘의 前門에 해당하는 금성옥진(金聲玉振)에서 대성전에 이르는 1km나 되는 길은 영성문(欞星門), 성시문(聖時門), 홍도문(弘道門), 대중문(大中門), 동교문(同交門), 규문각(奎文閣)이 차례로 나오는 前院, 규문각과 일곱번째 문인 대성문(大成門)사이에 있는 中院, 대성문에 들어서면서부터 성적전(聖跡殿)까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本院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大成殿(대성전)

대성전은 북경 자금성(紫禁城)의 태화전(太和殿), 태안의 대묘(岱廟)와 더불어 중국의 3대 궁전 건축양식의 하나로 꼽힌다. 대성전은 공자의 위패(位牌)를 모시는 전각(殿閣)이며. 공자의 위패를 중앙에 모시고 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 등 4성(四聖)이 좌우에 모셔져 있다.

대성전에는 생민미유(生民未有)라고 쓰여진 대형 편액이 문 입구에 걸려있는데 백성이 생긴 이래 아직까지 공자와 같은 성인은 없었다는 뜻이다. 내부에는 금빛 찬란한 닫집을 지어서 孔子像을 모시고 있으며 위패에는 지성선사공자신위(至聖先師孔子神位)라 쓰여져 있다. 소상(塑像)의 복장은 제왕에 해당하는 격식을 갖추고 있으며 문화혁명 때 파괴된 것을 1982년에 황금 48량(兩)을 들여 복원한 것이라 한다.

대성전의 지붕은 황궁에나 쓴다는 황색 유리 기와로 덮여있고 높이 32m, 폭 54m, 길이 34m의 웅장한 건물은 28개의 돌기둥으로 지탱하고 있으며 대전 정면에 서 있는 10개의 기둥들에는 두 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있어 중국 고대 석조예술의 걸작이라 할 수 있다.

 

 孔府(공부)

중국의 역대 황제중에 孔子를 받들지 않은 황제가 없었기 때문에 孔子의 종손에게는 제후와 동등한 지위를 주었는데 송나라 때부터는 종손에게 연성공(衍聖公)이란 작위가 주어졌다. 그래서 孔子의 종손은 제사를 모시는 기능 외에도 제후로서의 기능도 담당하고 있었다.

역대 연성공들과 10만명 이상의 孔氏 가문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을 공부(孔府)라 하는데 중국 역사상 가장 유구하고 보존이 잘 되어 있는 귀족 저택이라고 할 수 있다. 孔府는 성부(聖府)라고도 불리며 공묘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

孔子가 살아있을 때에는 가옥이 3칸뿐이었는데 이후 역대 황제들이 그의 자손들에 대한 여러차례의 하사를 거쳐 孔府의 규모가 부단히 확대되어 현재는 16㏊에 달하며 가옥이 463칸이나 된다.

孔府는 궁궐의 건물배치와 거의 비슷하게 전면부에는 연성공이 공적인 업무를 보는 관아건물들이, 뒷편에는 살림집들이 배치되어 있다. 안채에 해당하는 전상방(前上房), 전당루(前堂樓), 후당루(后堂樓)가 일렬로 배치되어 있고 동쪽에는 연성공 일가들이 사용

하는 건물들이, 서쪽에는 별당에 해당하는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궁궐과 마찬가지로 안채 뒷편에는 가족들의 휴식공간으로 넓은 정원을 꾸며놓고 있다.

中路, 東路, 西路로 나뉘어 있는데 동사자상(銅獅子像)이 버티고 있는 孔府의 대문으로 들어가면 中庭이다. 그 뒤에「聖人之門」이라는 현판이 걸린 문에 이어서 있는 重光門은 종손이 칙사를 마중하거나 의식을 행하던 곳이다.

그 뒤에 있는 二堂은 연성공이 고급관리를 접견하고 지방 예비 과거시험을 치르던 곳이며, 三堂은 孔氏 가문 내부의 분쟁을 처리하거나 죄를 논하는 곳이었고, 그 뒤에 있는 내택문(內宅門) 안은 타인의 출입이 제한되는 연성공의 사택이다. 東路에는 가묘(家廟)가 있고 西路는 손님을 맞는 곳들로서 봉건제후의 생활 단면들을 엿볼 수 있다.

 

 

 孔林(공림)

公林은 孔子와 10만이 넘는 그의 자손들의 가족묘지로서 묘비가 숲처럼 산재해 있으며 단일 가문의 묘지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최대 규모이며 풍부한 매장문화가 있는 곳이다.

孔子가 서거한 후 제자들이 공자를 여기에다 매장하였고 그 후부터 자손들이 죽으면 여기에 매장하기 시작했다.

公林의 前門에 해당하는 지성임방(至聖林坊)에 들어서면 二林門이 나오는데 二林門에는 삼림이 울창하게 둘러쳐져 있고 여기서 북쪽으로 뻗은 7km의 도로를 통하여 왼쪽으로 가면 주영교(株永橋)가 보인다.

삼도(參道) 앞에 있는 황색유리지붕과 붉은 벽으로 된 건물이 孔子의 제사를 모실 때 향단(香壇)이 설치되는 곳이다. 그 뒤에 孔子의 墓가 있다. 금색의 전서(篆書)로「大成至聖文宣王墓」라고 씌여져 있다. 孔子의 묘 왼편에 있는 작은 집은 제자인 자공(子貢)이 孔子가 세상을 떠난 후 6년간 묘를 지키던 곳이다.